2009년7월20일 소전교회 모습
새로 리모델링한 소전교회
( 73세의 이상금 목사님)
소전교회 이상금 목사님의 22년 변방목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예요. 그분께 인정받으면 결코 비참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충북 청원군 소전1구..대청호를 굽이돌아 산자락을 끼고 한참을 들어가면 영화 속에나 봄직한 산골마을이 펼쳐진다.
가지를 흔들면 주렁주렁 달린 감들이 후두득 떨어질 것 같은 감나무..소전리는 그렇게 깊은 산골에 홀로 떨어진 세상의 섬 같은 땅이다.
거기 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 저쪽 마을이 있고(소전1리&소전2리) 전부 합해야 60호 가옥에 100명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다.
소전교회는 소전리에서 하나 뿐인 교회다.100명의 주민들을 위해 40년 세월을 존재해 온 셈이다.
물론 모든 교회는 그 교회가 터잡고 있는 지역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교회가 주민들로부터 사랑 받는 건 아니다.
더 심하게 왕따가 돼버린 교회들도 적지않다. 소전교회도 한 때는 그랬다. 적어도 이상금(73) 목사님이 오기전에는...무속신앙이 생활이던 소전리 사람들에게 교회는 일종의 이방이었다.
교회 종소리가 들리면 한번쯤은 교회를 향해 욕설이라도 질러대야 속이 풀리던 사람들이다.
새해가 시작되면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온 동네가 굿으로 시끌벅적했다.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이곳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소전리는 이방의 선교지나 다름 없는 곳" 이라 불렀다.
남자 목회자들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6개월 있으면 오래 머무른 걸로 쳤었다.
여기 홀몸의 여자 전도사가 부임했다. 역시 교회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금 목사님은 종소리를 멈췄다 그게 도리어 주님 뜻이라 여겼다.
답답한 마음에 목놓아 기도라도 하면 역시 거센 항의가 들어왔다. 술에 취한 이웃 남자가 손지검까지 해 입원도 해었다.
처음 부임할 때 친구 목회자들이 "거긴 안 된다" 며 막을 때 차라리 들을 걸...후회도 했다
밤을 새며 기도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상금 목사님은 소전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민들과 하나가 돼야 했다.불쌍항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에게 필요한 교회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들어오는데 이 외딴 산골에 이목사님의 승용차는 앰불런스가 되기도 하고 때론 택시가 될수도 있었다.주민들은 이제 환자가 생기거나 급히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기면 교회로 전화를 한다.그러면 이목사님이 "출동" 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는 셈이다.
농번기에 바쁜 사람들은 이 목사님을 찾아서 소여물 주는 일도 부탁한다. 가끔은 집배원이 되어 편지를 전해 주는 일도 이목사님의 몫이다.
어버니날이면 이 목사님은 경로잔치를 연다 자신도 어디를 가든 노인 대접받을 나이지만 소전리에선 노인 축에도 끼지 못한다.
젊은이들은 모두 소전리를 떠나고 결국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새마을운동(?)을 한다. 가령 이 목사님이 지붕을 개량하면 마을 사람들은 따라한다.
우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는 그들에게 모터를 돌려 수도시설을 처음 한 것도 마을 사람들에겐 모델이됐다.
무엇보다 6개월이면 떠날 줄 알았는데 22년을 함께 있으니 이젠 누구도 이목사님을 남 대하듯 않는다. 고맙다며 식사초대도 곧잘 한다.
이목사님이 목사로 안수받은 것도 주민들의 칭찬 때문이다.
이목사님이 소속한 노회로선 그가 여성이고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자격을 갖춘 목사님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하나됨" 이 곧장 교회를 부풀리는 데까지는 연결되지 않는다.
좋은 건 좋은거고, "예수쟁이" 되는 건 또 다른 일이라 여긴다. 그래서 전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말은 안 해도 주민들의 생각임을 잘안다. 그래도 어른들이 10 명씩이나 된 건, 기적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라도 생기면 늘 찾아서 대화를 한다.
어쩔 수 없이 대화 속엔 전도 메세지가 담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세상을 떠난이들 또한 적지 않다. 게다가 언제가부터 그 요란하던 굿 풍습이 하나,둘 사라졌다.
무당들도 떠났다. 교회가 마땅히 있어야 할 이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교회 못 가서 미안혀" 하는 말이 이목사님을 만나 하는 인사말이 돼 버렸다. 가고 싶지만 못 간다는 의미다.
소전리를 아는 사람들은 여기까지 온 게 얼마나 큰 변화인지 잘 안다. 이제 주름이 완연히 패인 이목사님의 얼굴만큼이나....
몇 달 전 이목사님은 심하게 앓았다. 몇 주간 병원신세를 졌다 사례비 20만원(10년전)에 승용차 연료비 5만원이 수입이 전부인 이 목사님으로선 감당하기 불가능한 입원비가 나왔다. 다행히 주변에서 해결해줬다.
그러나 옆에서 이 목사님을 지켜보는 이들은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다. 또 그렇게 입원하거나 거동이 힘들게 되면 간호해 줄 사람도 없고 병원비는 또 어떻게 감당할 지 걱정스러운 게다. 이런 주위의 걱정을 의식한 듯 이목사님은 늘 같은 대답을 준다.
"혼자 사는데 사례비 많이 받아서 뭘 해요. 게다가 교회도 크게 세우지 못한 건 모두 내 책임인데 무슨 낯으로.....이것도 고마울 따름이죠. 그리고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채우시지 않을까요. "엘리야를 생각해요.
까마귀까지 동원해서 엘리야를 돌보시던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하나님께 인정 받는 것이예요. 그분께 인정받으면 결코 비참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이렇게 보면 결코 홀몸이라 해서 내 장래를 걱정할 이유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불안하시면 데려가면 그뿐이니까요.
고통 당하며 하나님께 누가 되도록은 안 만드실 것 아니예요?.. 그래서 내가 가장 큰 기도제목은 이 거예요.
맡기신 일이 끝나는 대로 곧장 하나님이 불러주심사 하는거죠.
너무 큰 욕심인가요?...
-기독신문- 박영철 기자
지금으로부터 10년전에 기독신문에 실렸던 글(년도는 글을 쓰면서 수정했습니다)
토종닭 마닭죽
대청호 발원지
고사리 재배단지
일년만에 찾은 소전교회
가끔 동생내외가 찾는 소전교회..
충북 문의면에서 차로 약 30분 쯤 들어가면 소전교회가 있다
교인이라야 할머니 한 분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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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찾았을 땐 남자 집사님 한 분과 할머니 이렇게 두 분이 계셨는데
집사님이 얼마전에 네달란드로 이민을 가시고 지금은 연로하신 할머니 한 분만이 예배를 드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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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교회를 찾았을 땐 멀리 대전에서 집사님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여 집사님은 얼마전까지만해도 문의면에서 병원을 경영하시다가 목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멀리 대전으로 병원을 이전해 가끔 이곳을 찾으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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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만 해도 다 쓰러져가던 교회가 리모델링을 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졌다
목사님께서 힘드셨을텐데 어떻게 이런 큰일을 하셨느냐고 했더니
주님께서 하셨지 제가 뭐 한일 있나요 하시며 겸손함을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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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게 아름다운 손길이 있기에 주님의 성전이 이렇게 아름답게 세워지고 있다
동생 내외도 자주는 찾지 못하지만 가끔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작은 나눔을 갖고 있다.
새벽마다 부르짖는 목사님의 기도와 같이 이 마을 전체가 모두 예수믿는 마을이기를 기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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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마치고 목사님께서 이렇게 귀한 토종닭 마닭죽을 사주셔서 맛있게 먹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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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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