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올려다 보았지만, 하늘엔 암흑만이 흐른다.
천왕봉 일출을 얼마나 고대했으면 꿈속에서까지 기원했을까.
천왕봉 일출은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장터목 새벽하늘은 구름으로 잔뜩 덮여 있다.
그럼에도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해 부산을 떠는 등산객들의 소음에 장터목 대피소의 아침이 열리고
일출 시간에 맞춰 05시 한 가닥 희망을 걸음에 실으며 장터목을 출발해 제석봉으로 향한다.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기에 어둠에 갇혀있는 제석봉 풍광은 포기하고 천왕봉 일출을 택했던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일행들에게 제석봉 풍광을 보여줄 것을 두 가지 모두 놓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불빛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제석봉 고사목 지대를 일행들에게 설명해 주며 길을 오른다.
나야 그 길을 수 없이 와 봐서 괜찮지만, 일행들에게 그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늘로 문이 통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통천문을 지날 때쯤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산의 아침에 구름이 내렸다.
밤사이 수없이 산을 오르내렸을 구름은 아직도 성에 안 찼는지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걷힐 기색이 없다.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기에 마음을 비운다.
긴 여정 중에 여기까지 오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낯익은 등산객들과 자주 만나곤 했었다.
" 디자인회사 봄날" 직원 8명이 워크숍으로 지리산 종주를 하고 있었는데 노란 단체복을 입고 종주 길에 든 청년들이 얼마나 멋지던지 종주 길 내내 시선이 가곤 했다.
긴 여정의 지리산 종주!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참 멋있는 사장님과 멋진 직원들이다.
마침내 다다른 천왕봉 정상..
기다리고 또 기다려 보지만 이내 구름은 겹겹이 덮여 있다.
천왕봉 일출 보기를 그렇게 원했건만, 자연은 우리에게 마음의 빛으로 보라는 뜻인가 보다.
욕심만큼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구름이 야속하지만 한 줄기 빛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 본다.
마음의 욕심부터 비워야 자연의 순리대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빛내는 것 같다.
일출은 볼 수 없었지만, 장터목에서 일찍 출발해 여유 있는 산행이 될 것 같다.
어둠을 딛고 올라선 걸음들이 그새 저 아래에 있다.
일출도 없는 천왕봉엔 정상석을 끼고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나마 바람이 잔잔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한결 수월하다.
어머니 품과 같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바라보니 굽이굽이 이어지는 힘찬 산줄기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그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겨레의 명산답게 웅장함으로 가득 차 능선마다 대자연의 숨결이 느껴진다.
종주를 하는 등산객들은 이곳 천왕봉에서 중산리와(5.4km) 대원사 계곡(11.7km) 두 곳으로 나뉘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거리가 가까운 중산리로 하산하고 있다.
경치로 봐서는 대원사 계곡이 아름답지만, 거리가 중산리의 두 배가 넘으니 대원사 계곡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대원사 계곡을 택한 것은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곳이어서 한적하고 그곳의 풍경이 서정적이며 가을빛이 곱기 때문이다.
먼 거리지만 우리 일행은 계획대로 그 길로 내려선다.
중봉의 가을빛이 마치 수채화를 그려 놓은 것 같다.
아름다운 풍광을 볼 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진다.
무겁게 드리운 구름이 드디어 비를 내린다.
피부로 느껴지기 어려울 만치 소량이기에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구름 속을 방황하던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면서 가을을 채색하고 있다.
중봉을 오르기 전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고 행동식으로 아침 식사를 한다.
마치 오늘을 위해 준비라도 한 것처럼 아늑한 공간이다.
제 빛을 잃은 들꽃이지만 사위어져 가는 그 빛이 참 곱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도 나를 생각할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햇살과 구름이 변덕을 부려도 흐린 하늘 아래 가을 야생화는 제 빛을 띠고 있다.
그 자태가 얼마나 고운지..
길 떠나지 않고 기다려준 산오이풀이 참 고맙다.
같은 풍경이라도 오던 길 되돌아보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길 위에 흘리고 온 환희의 웃음이 아직도 그곳에서 뛰어노는 것 같다.
중봉..
중봉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아름다워 많은 등산객이 이곳에서 비박을 하기도 한다.
뒤로는 천왕봉이 올려다보이고 굽이굽이 물결치는 가을빛이 능선을 타고 아기 걸음으로 아래로 내려간다.
이곳은 풍광도 아름답지만, 등산객들의 발이 뜸해 한적하고 조용해서 더 주목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순박하고 청초한 구절초!
구절초도 이렇게 무리지어 피어있으니 덜 외로워 보이고 정겹게 느껴진다.
구절초가 하얀 미소를 지으며 가을을 노래한다.
넓은 곳을 놔두고 하필이면 이 벼랑 끝에서 꽃을 피웠을까?
벼랑 끝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구절초가 바람에 어찌 될까 염려스럽다.
발길을 돌릴 수 없을 만큼 애처로웠는데 바람은 애잔한 꽃들 앞에서 여린 줄기를 비켜가는 너그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물들어가는 가을빛을 즐기고 있는 일행들..
그곳에서 다시는 못 올 것처럼 가을빛과 함께 한 풍경을 이룬다.
출입통제 표시가 있는 곳..
바로 이곳이 태극종주 구간이 이어지는 곳이다.
이곳을 지날 때면 표지판을 눈여겨보게 된다.
가지 말라는 곳을 굳이 가겠다는 등산객들이나 그들을 말리는 국립공원 관리국이나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오랜 시간 실랑이를 해오는 곳이다.
이곳을 지날 때면 묵묵히 서 있는 고사목이다.
언제까지 이곳 중봉의 지킴이가 될까?
중봉에서 바라보는 황금능선이 오색 빛으로 요동을 치고 발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마야계곡도 한 폭의 수채화가 펼쳐지듯 그 빛이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다.
굽이쳐 이어지는 황금능선 너머로 잔잔한 운해가 열리고 여러 산봉우리가 아득하게 펼쳐진다.
보이는 세상은 온통 산뿐이다.
그 산의 허리 한쪽을 헤집고 인간들은 자리를 틀고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어찌 산을 떼어놓고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영혼이 살아서 숨 쉬는 산..
산에서 배우는 나의 삶은 이론적 삶이 아닌 자연 생태적 삶이기에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산이 있는 한 내가 거기 있다.
모습은 안 보일지라도 그곳엔 내가 흘리고 온 기쁨이 있고 행복의 미소가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지난 가을 이 길을 걸을 때는 단풍이 다 지고 가지만 앙상해 마음이 몹시 허전했는데 그 마음을 보상이라도 해 주듯이 가을빛이 참 곱다.
같은 산을 올라도 풍경에 따라 마음의 느낌도 달라진다.
수려한 침묵이 흐르는 깊은 숲
가을빛을 다 내린 나무지만 어울림이 좋아 내 마음에 고운 풍경으로 심었다.
사람도 생의 가을 앞에 서 있을 때 이런 어울림으로 따스함이 느껴지는 풍경이었으면 좋겠다.
오랜 세월을 보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숨결이 끊기고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지리의 한 풍경이 되어 그 어울림이 참 좋다.
지리의 사랑이 커서일까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저 높이 천왕봉이 올려다보이는 이곳..
지난가을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는 혼자여도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좋아 마냥 붙들고 있었는데 오늘은 잿빛 구름이 등을 밀어낸다.
자연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변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손만 타지 않으면 늘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구절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반긴다.
써리봉..
써리봉에서 올려다보는 천왕봉이 웅장하고 아름답다.
이런 길은 혼자여도 좋고 함께여도 좋다.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날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지리산 길을 걷고 있음이 참 행복하다.
풍경에 취하다 보면 일행들도 잊고 갈 때가 있다.
써리봉을 조금 지나 그 버릇이 또다시 도져 혼자서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이어진 걸음이 치밭목 산장까지 갔다.
치밭목 산장으로 내려서는 풍광이 참 아름답다.
늘 이곳에 서면 풍광에 이끌려 한참 머무르게 된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숲이 이곳으로 끌어들이는지도 모른다.
일행들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기에 이곳에서 사진을 담으며 한참의 시간을 보낸다.
식수장도 가깝고 물의 양도 풍부하다.
식수장 뒤로 이어진 능선은 태극종주 구간인 웅석봉에서 뻗어내린 달뜨기 능선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식수장 옆으로 등산객들이 다닌 흔적이 보인다.
치밭목 산장..
웅석봉에서 뻗어내린 달뜨기 능선이 병풍을 쳐 놓은 듯하고 그 아래로 치밭목 산장이 그림처럼 아늑하게 자리를 잡았다.
예전의 치밭목은 그 이름만 떠올려도 솟구치는 그리움을 떨쳐낼 재간이 없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아련함이 많이 퇴색되었지만 지금도 그 숨결이 느껴지고 등산객들에겐 무한한 그리움이고 동경의 대상이다.
약 20분이 지나서야 일행들이 내려온다.
이곳에서 잠시 쉬며 행동식으로 점심을 먹는데 등산객 한 분이 버너에 물을 끓여 주셔서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따뜻함을 맛본다.
마음 같아서는 내일이 주일만 아니면 한적한 이곳에서 하루 더 유하고 싶은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치밭목 산장을 나선다.
계단을 내려서며 대원사 계곡 심원 속으로 접어든다.
아직 물줄기는 보이지 않지만, 계곡의 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얼기설기 그물망을 쳐 놓은 원시림 속으로 들어서는 듯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활엽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운 빛을 띠기 시작한다.
지난해보다 열흘 정도 빨라서인지 단풍이 아직은 설익은 밥 같지만, 앞으로 펼쳐질 풍광을 떠올리니
벌써 마음이 설렌다.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와 울창한 숲에 마음이 동요되어 나 또한 숲의 일부가 된 느낌이다.
매일 이런 곳에서 살 수는 없을까.. 숲에 물들어 마음도 평화롭다.
자연은 인간과 멀리 있어야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풍광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춰진다.
봄에는 봄빛, 여름에는 여름빛, 가을에는 오색 찬란함으로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오색 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에 시샘이 나서일까?
질펀하게 깔아 놓은 돌들이 자칫하다가는 넘어지기에 십상이다.
고요한 숲 속 푸른 등걸엔 버섯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버섯들의 어울림이 참 좋아 보인다.
계곡물에 잎을 떨군 단풍잎들이 목을 축이며 시린 가을을 맞고 있다.
더러는 가을빛도 채 들지 않은 나뭇잎이 짧은 생을 마치고 있다.
두런대는 가을 숲 사이로 신선의 그림자를 밟으며 그 길을 걷는다.
그 길을 걷는 나 또한 신선이 된 느낌이다.
대원사 계곡의 무제치기폭포는 장마가 끝난 뒤에 오면 나이아가라 폭포만큼 유명세를 치르는 곳인데 가을 가뭄 탓일까? 물이 겨우 바위벽을 타고 폭포의 체면만 유지하고 있다.
파장으로 치닫는 가을이 지리산에 오래도록 머무르면 얼마나 좋을까?
수려한 침묵이 흐르는 대원사 계곡의 가을 향기가 마음머저 훈훈하게 한다.
누군가가 그랬다. 지리산에 가면 얼마나 빨리 내려오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신선이 유영하듯 청정계류에 오색 단풍잎들이 갈채를 보내며 지리산의 축제를 열어간다.
계곡 바위 틈새로 흘러내린 물줄기에 햇살이 내리니 바위의 이끼 빛이 단청 빛보다 더 아름답다.
나무마다 형형색색으로 가을 수채화를 그려나간다.
운명처럼 다가온 가을이 오색빛으로 너스레를 떤다.
물들어 가는 단풍만 보아오다 초록의 이파리를 보니 눈도 마음도 싱그럽다.
가을이란 계절은 이렇게 갖가지 풍경을 이루고 있어 대원사 계곡이 더 빛난다.
대원사 계곡의 가을은 이렇게 단풍과 가을꽃들의 어울림 속에 익어가고 있다.
들국화의 향기가 가을을 더욱 실감케 한다.
걸어온 길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치밭목 대피소가 올려다보인다.
앞만 보고 갔으면 그냥 지나칠 뻔 했는데 그곳에 남겨 놓고 온 그리움이 또 저울질을 한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풋풋한 향기가 느껴진다.
이곳 유평리 계곡은 산줄기가 길어 지리산 다른 구간보다는 등산객이 뜸하지만 정통종주를 꿈꾸는 등산객들은 해가 거듭될수록 늘어나고 있다.
유평리 쪽으로 들어서고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종주할 때 산행을 마친 시간이 15시 15분쯤인데 오늘은 늦은 것 같아 일행들을 뒤에 두고 동동걸음을 친다.
매번 지리산 종주를 할 때마다 차려 놓은 밥상에서 밥을 먹듯이 편하게 했었는데
이번에는 리더의 자리에 있다 보니 모든 게 신경이 쓰인다.
걸음에 속도를 내서일까..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유평리에 도착했다.
안도의 숨을 쉬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카메라를 들고 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가을빛을 담는다.
30분쯤 지나서야 일행들이 도착해 그곳 무릉도원에서 담백하고 맛있는 토종닭 백숙으로 지리산 종주의 마침표를 찍는다.
사흘 동안의 긴 여정을 지리산에서 보냈건만 지리산의 그리움은 가시는 게 아니라 지리산 넓이만큼이나 내 안에 쌓여 돌아서는 걸음에 아직도 미련이 남는다.
신록으로 물든 봄날 철쭉이 피면 다시 올 것을 다짐하며 3일간의 행복이 내 안에서 춤을 춘다.
주님이 계셔서 행복하고 산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2012년 10월 6일 ........산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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